미국의 금 보유량 확대 전략: 글로벌 통화 경쟁과 금융 패권 유지의 속내

최근 미국 뉴욕상품거래소(COMEX)의 금 재고량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며 국제 금융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25년 3월 기준 COMEX의 금 보유량은 3,970만 온스(약 1,150억 달러 상당)로, 1992년 통계 집계 이후 최고 수준을 달성했다. 이는 단순한 시장 움직임을 넘어 미국의 전략적 금융 정책과 글로벌 경제 질서 재편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특히 미중 간 패권 경쟁, 달러 체제의 지속 가능성, 그리고 금을 통한 재정적 회복력 강화 등 다층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1. 금 확보 경쟁과 달러 기축통화 지위 방어
(1) 탈달러화 추세에 대한 대응
브릭스(BRICS)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탈달러화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은 금 보유를 통해 달러의 신뢰도를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2024년 기준 브릭스 5개국(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금 보유량은 총 5,746.5톤으로, 2020년 대비 12.3% 증가했으며 이는 전 세계 금 보유량의 16%에 해당한다. 중국의 경우 2024년 외환보유고 중 금 비중을 5.5%까지 끌어올렸고, 러시아는 29.5%로 집중화를 추구하며 서방 제재에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맞서 미국은 금 보유량을 유지·확대함으로써 달러의 실질적 담보물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2) 달러 신뢰도 강화를 위한 금의 심리적 기능
금은 역사적으로 통화 가치의 최종 심리적 안전망으로 기능해왔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의 금-달러 태환 중단 이후에도 미국은 8,134톤(전 세계의 23.8%)이라는 압도적 금 보유량을 유지하며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공고히 해왔다. 금 보유량의 물리적 존재감은 시장 참여자들에게 달러의 안정성을 암시하며, 이는 특히 미 국채 수요 유지에 기여한다. 미국 재정적자가 연간 1조4,000억 달러를 넘어서는 상황에서 국채 매각을 통한 자금 조달이 필수적인 만큼, 금 보유는 투자자 신뢰 확보의 핵심 수단이다.
2. 경제적 위기 대비와 재정적 회복력 강화
(1) 인플레이션 및 통화 가치 하락 헤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금 가격은 트로이온스당 2,900달러를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는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력과 통화 가치 불확실성에 대한 시장의 반응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대차대조표 확대(2023년 기준 8.9조 달러)와 실질 금리 하락 추세 속에서, 금은 실질 자산 가치를 보존하는 수단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골드만삭스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11월 이후 미국 무역 적자 확대의 60% 이상이 금 수입 증가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2) 회계적 재평가를 통한 재정 여력 확보
미국 재무부는 현재 금을 온스당 42.22달러(1970년대 장부가)로 평가하고 있으나, 시장 가격(2,950달러/온스) 기준으로 재평가할 경우 7,500억 달러의 잠재적 자산 가치 상승 효과가 발생한다. 이는 연간 재정 적자 규모(1.4조 달러)의 50% 이상을 상회하는 수치로, 재정 건전성 제고를 위한 전략적 옵션으로 고려되고 있다. 프란시스코 블랑치(BofA)는 "재평가는 회계적 조정이지만 연준의 대차대조표 확장 효과를 제공한다"고 지적하며,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인프라 투자 확대 정책과 연결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3. 글로벌 금융 시장 통제력 강화
(1) 금 시장 주도권 확보
COMEX의 금 재고량 급증(2025년 1월 기준 3,970만 온스)은 단순한 관세 회피 차원을 넘어, 미국이 금 가격 결정 메커니즘을 장악하려는 전략을 반영한다. 2024년 말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확대 우려가 제기되자, 트레이더들은 런던 금시장 대비 15% 이상 프리미엄이 형성된 뉴욕 시장으로 금을 집중 반입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금 유동성의 허브로 자리매김하며,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2) 디지털 통화 전쟁과의 연계
트럼프 행정부는 가상자산(특히 비트코인)을 전략적 비축 자산으로 고려하며 블록체인 기반 금융 시스템 구축을 모색하고 있다. 2024년 신시아 루미스 상원의원이 제안한 '가상자산 전략 비축법안'은 "비트코인의 희소성이 달러 체제를 보완할 수 있다"며 디지털 자산과 금을 연계한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CBDC)와 유럽의 디지털 유로 추진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분석된다.
4. 지정학적 리스크 관리와 동맹국 확보
(1) 러시아 제재의 교훈과 자산 동결 방지
2022년 서방이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 3,000억 달러를 동결한 사건은 각국에 달러 의존도 감소를 촉발시켰다. 중국은 이에 대응해 2023년 10월 기준 미 국채 보유액을 7,601억 달러(2013년 대비 40% 감소)로 축소하는 동시에 금 보유량을 2,271톤까지 늘렸다. 미국 역시 유사한 제재 상황에 대비해 금을 동결 방지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 중이다.
(2) 동맹국에 대한 금융 지원 채널 구축
런던 금고의 보유량이 2022년 9,611톤에서 2025년 8,535톤으로 11% 감소한 것은, 미국이 동맹국들의 금 보관을 유인하며 금융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국 중앙은행(BOE)의 금 인출 대기 기간이 4주로 늘어난 상황에서, 미국의 금 시장 유동성 공급은 유럽 국가들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제공한다.
5. 장기적 경제 구조 개편과 기술 주도권 경쟁
(1) 그린 에너지 전환과 금의 산업적 수요
신재생에너지 및 전기차 산업 확대로 구리, 니켈과 함께 금의 산업적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반도체 생산과 태양광 패널 제조에 필수적인 금은 미국 제조업 회생 전략과 직결된다. 2024년 구리/금 가격 비율이 역사적 균형점을 이탈하며 금의 상대적 가치가 강조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금 확보는 첨단 산업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도 의미를 가진다.
(2) AI 및 양자컴퓨팅 시대의 금융 인프라
블록체인과 분산원장기술(DLT) 기반 결제 시스템 구축에 금이 디지털 자산의 물리적 담보로 사용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페이스북의 디엠(Diem) 프로젝트 실패 이후, 미국은 금을 기반으로 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검토하며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에 대응하고 있다.
결론: 금을 통한 21세기 금융 패권 재편
미국의 금 보유량 확대는 단순한 자산 다변화를 넘어, 글로벌 통화 체제의 재편과 기술 주도권 경쟁을 포괄하는 종합 전략이다. 금을 달러 체제의 심리적·물리적 버팀목으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을 주도하려는 이중적 접근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국제적 금융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으며, 특히 BRICS 국가들의 금 집중 확보와 맞물려 새로운 경제 블록 형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향후 미국은 금 보유 정책을 외교적 협상 카드로 활용하며 기술 표준 경쟁과 연계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