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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미키17』: 나는 몇 번째 나인가? (feat.자본주의가 복제한 인간의 비극)

by zed 2025.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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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 인간 서사를 통한 존재론적 성찰과 사회적 풍자

 

봉준호 감독의 『미키17』은 인간의 정체성, 자본주의적 소모, 그리고 권력 구조를 우주적 스케일로 재해석한 SF 드라마다. 2021년 완성된 시나리오는 2025년 개봉 당시 정치적 우화로 오독되기도 했으나, 본질적으로 역사적 독재자의 패턴과 인간 존재의 보편적 딜레마를 탐구한다. 이 영화는 복제 기술이 일상화된 미래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가 시스템에 의해 어떻게 평가절하되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생산성 중심의 현대 사회를 재고하게 만든다.


1. 기획의도: 역사적 악몽과 현대적 우화의 교차

 

봉준호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부부,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등 역사적 독재자의 이미지를 차용해 니플하임 행성의 지도자 '마샬' 부부를 창조했다. 이들은 식민지 개척을 명목으로 인간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권력 구조를 상징한다.

 

감독은 "2021년 완성된 시나리오가 현실 정치와 우연히 겹쳤을 뿐"이라 강조하지만, 이는 의도된 보편성의 결과다. 익스펜더블(Expendable) 시스템은 자본주의 하 노동자의 탈인간화를 은유하며, 2050년대 배경이지만 2020년대 글로벌 불평등 문제와 직결된다.

 

장르적 혁신과 봉준호 스타일의 진화

 

『설국열차』의 계급 비판과 『기생충』의 사회적 풍자를 SF로 확장한 본작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봉준호 특유의 블랙 코미디를 유지한다. 마샬 부부가 '소스'라는 미지의 식재료를 독점하는 장면은 『기생충』의 돌묘 장면과 유사하게 계급적 특권을 풍자한다. 그러나 원작 소설 『미키7』의 철학적 질문을 시각적 스펙터클로 대체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2. 등장인물: 복제체의 정체성 분열과 권력의 이중주

미키17 vs 미키18: 분열된 자아의 화해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두 복제체는 동일한 유전자지만 성격이 극명히 대비된다. 미키17(소심·수동적)미키18(공격적·반항적)의 갈등은 테세우스의 배 역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클론 기술이 신체적 연속성을 보장하더라도 경험의 차이가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함을 보여준다. 18번이 17번의 트라우마적 기억을 거부하며 보여주는 분노는,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주장한 "타자의 시선으로서의 자아" 개념을 연상시킨다.

권력 구조의 대리인들

  • 마샬 부부: 토니 콜렛과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독재자 커플은 '소스' 배급을 통해 계급 차별을 정당화한다. 그들의 사치스러운 만찬 장면은 자본주의 엘리트의 타락을 풍자한다.
  • 티모(스티븐 연): 미키의 오랜 친구이자 착취자. 인간 관계에서의 배신은 개인적 이익이 도덕적 유대를 압도하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3. 줄거리 구성: 죽음의 순환에서 탈출하는 서사

3막 구조는 복제-갈등-해체의 패턴으로 전개된다.

1막: 익스펜더블 시스템의 가혹함

니플하임 개척대는 인간을 3등급으로 분류한다: 1등급(지도자), 2등급(기술자), 3등급(익스펜더블).

 

미키17이 크리퍼 동굴 탐사 중 사망했다고 판단되어 미키18이 생성되지만, 17번이 생존하면서 시스템의 오류가 노출된다. 이는 플롯의 전환점이자 철학적 질문의 시작이다.

2막: 자아 대 자아의 투쟁

두 미키의 대립은 점차 협력으로 전환된다. 18번이 마샬의 만찬에 난입해 식탁을 뒤엎는 장면에서 폭력적 저항은 시스템 자체의 모순을 폭로한다. 카메라는 이때 17번의 시점에서 18번을 추적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미키가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3막: 시스템 붕괴와 새로운 정체성

결말에서 미키17이 클론 프린터를 파괴하고 본명 '미키 반스'를 회복하는 것은 개인이 시스템의 넘버링을 거부함을 상징한다. 엔딩의 초록색 풀은 생명의 지속 가능성을 암시하며, 『설국열차』의 폐허와 대비되는 희망적 전망을 제시한다.


4. 철학적 의미: 소모품 인간에서 주체적 존재로

헤겔 변증법적 자아 인식

미키17과 18의 갈등-화해 과정은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초기에는 18번이 적대적 타자로 인식되나, 점차 서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며 새로운 합의점(정신)에 도달한다. 봉준호는 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현상학적 명제를 시각화했다.

자본주의 비판과 휴머니즘

'익스펜더블' 시스템은 노동자의 탈기술화를 은유한다. 미키가 17회 재생된 후에도 임금이 인상되지 않는 설정은 현실의 비정규직 문제를 투영한다. 나샤(나오미 애키)와의 사랑 라인은 생산성 중심 사회에서 인간 관계의 치유적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일부 평론가는 이를 할리우드적 클리셰로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5. 아쉬운 점: SF 세계관의 미완성성

과학적 논리의 부재

니플하임 행성의 물리법칙(중력, 대기 구성 등)에 대한 설명이 결여되어 SF적 설득력을 약화시켰다. 클론 기술이 신체만 복제하는지, 의식까지 전승되는지에 대한 설정도 모호하다. 예를 들어 미키18이 17번과 다른 성격을 갖게 된 이유가 '경험의 차이'인지 '기술적 결함'인지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

마샬 부부가 악의 화신으로 과도하게 단순화된 점은 『기생충』의 복잡한 계급 서사에 비해 퇴보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부인 캐릭터의 내적 동기가 부족해 권력 구조의 구조적 폭력성을 피상적으로 묘사했다는 지적이 있다.


6. 확장 가능성: 미키 유니버스의 잠재력

프리퀄: 지구 붕괴 서사

원작 소설 『미키7』은 지구의 환경 재앙을 자세히 다룬다. 미키 반스가 익스펜더블에 지원하게 된 동기(빚 상환)를 탐구하는 프리퀄은 자본주의 말기 사회의 생존 경쟁을 부각시킬 수 있다.

스핀오프: 원주민의 시선

니플하임 원주민 '크리퍼'의 시각에서 본 식민지 개척 이야기는 『아바타』와 유사한 생태학적 주제를 발전시킬 잠재력이 있다. 크리퍼의 집단지성 체계와 인간의 개인주의적 사고가 충돌하는 과정을 그린다면 SF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 윤리 시리즈

클론 기술의 사회적 파장을 집중 조명하는 외전 시리즈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 복제인간의 인권 문제
  • 기억 삭제 기술의 범죄적 남용
  • 유전자 개조 계급사회의 출현

결론: 불완전함을 포용하는 인간성의 승리

극 중에서 최고의 요원인 나샤가 동료들에게 인간으로도 취급 받지 못하는 3등급 미키를 맹목적으로 사랑한 이유는 비록 그가 복제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해내면서 동료들에게 보인 인간성과 내면적 본질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미키17』은 완벽한 SF물이라기보다 인간 존재의 근본적 질문을 재패키징한 철학적 실험이다. 시스템에 저항하는 개인의 여정을 통해 봉준호는 관객에게 "우리의 가치는 생산성이 아닌 존재 자체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기술적 완성도 측면에서 아쉬움은 남지만, 복제 인간이라는 허구적 장치가 현실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자본주의 말기에서 개인이 어떻게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적 화두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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