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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환을 통해 자유를 갈구하나 결국 과거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비극, 《에밀리아 페레즈》

by zed 2025.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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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젠더, 폭력, 구원의 교차로에서 노래하는 트랜스젠더 서사

 

프랑스의 거장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2024년 작품 <에밀리아 페레즈>는 트랜스젠더 마약 카르텔 보스의 인생 변주를 통해 젠더 정체성, 폭력의 순환성, 구원의 가능성을 탐구한 파격적인 뮤지컬 범죄 드라마다. 멕시코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배경으로, 인간의 내적 갈등과 사회적 편견을 음악과 서사의 혼종적 형식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칸 영화제에서 트랜스젠더 배우 최초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았으나, 문화적 오리엔탈리즘 논란과 장르적 실험성 사이에서 찬반을 불러일으켰다.


1. 기본 정보: 파격적 장르 혼종의 출발점

<에밀리아 페레즈>는 프랑스-멕시코 합작 영화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이 보리스 라종의 소설을 각색해 132분의 러닝타임에 담아냈다. 주요 배우로는 트랜스젠더 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이 남성 카르텔 보스 '마니타스'와 여성 '에밀리아 페레즈' 역을 동시에 소화했으며, 조 샐다나(변호사 리타), 셀레나 고메즈(아내 제시)가 출연했다.

 

2024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경쟁 후보로 초청받았으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트랜스젠더 배우 최초의 칸 수상 기록을 세웠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여우주연상 등 13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나, 주제가상과 여우조연상(조 샐다나)만을 수상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2. 자크 오디아르: 프랑스 사회의 단면을 해부하는 장르 실험가

작품 세계의 기반: 소외된 자들의 생존 서사

자크 오디아르(1952~ )는 프랑스 영화계에서 “사회적 소외와 개인의 도덕적 모호성”을 주제로 삼는 독보적인 감독이다. 소르본대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그는 로만 폴란스키의 조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1994년 데뷔작 <그들이 어떻게 추락하는지 보라>부터 <예언자>(2009), <디판>(2015)에 이르기까지 교도소, 이민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해왔다. 그의 작품은 누아르와 멜로드라마의 경계를 넘나드는 형식적 실험으로 유명하며, <에밀리아 페레즈>에서도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기존의 범죄 서사를 해체했다.

스타일의 진화: 폭력의 시학에서 장르의 탈경계로

오디아르는 폭력의 순환성을 주제로 한 <예언자>에서 감옥 내 권력 구조를 날카롭게 비판했고, <디판>에서는 난민의 정체성 재구성을 통해 유럽의 이민 정책을 질문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젠더 전환을 통한 자기 구원”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특히 그는 팬데믹 기간 중 오페라 대본을 구상하며 뮤지컬 형식을 도입, 캐릭터의 내면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실험했다. 이는 기존의 리얼리즘적 접근을 넘어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그의 신념을 반영한다.


3. 줄거리: 신분 죽이기, 삶 다시 쓰기

1막: 마니타스의 죽음과 에밀리아의 탄생

멕시코 최대 마약 카르텔의 보스 마니타스(카를라 소피아 가스콘)는 체포 위기 속에서 성전환 수술을 결심한다. 그는 능력 있으나 좌절한 변호사 리타(조 샐다나)를 고용해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고, 에밀리아 페레즈라는 신분으로 재탄생한다. 수술 후 에밀리아는 스위스로 망명한 아내 제시(셀레나 고메즈)와 자녀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과거의 폭력적 습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2막: 유령의 귀환과 자기 구원의 시도

에밀리아는 ‘라 루세시타’ 재단을 설립해 마약 전쟁 희생자의 유해를 수습하며 속죄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리움에 휩싸인 그녀는 제시와 자녀를 멕시코로 불러들여 ‘먼 친척’으로 위장하며 접근한다. 이 과정에서 제시의 새로운 연인을 폭행하고, 재산을 강탈하는 등 과거의 폭력성이 재발한다.

3막: 비극적 종말과 미완의 구원

결국 제시와 연인은 에밀리아를 납치해 복수를 시도하고, 이를 구출하러 온 리타와의 추적전 끝에 세 사람은 차량 추락으로 동반 사망한다. 영화는 에밀리아의 시신이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인정받는 장면으로 막을 내리며, “과거의 죄와 현재의 정체성의 화해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4. 주제 분석: 젠더 전환은 폭력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가?

정체성의 역설: “수술은 몸을 바꿀 뿐, 본질은 그대로”

영화는 젠더 전환이 단순한 신체적 변화가 아님을 강조한다. 마니타스가 에밀리아로 변한 후에도 카르텔 보스 시절의 권위주의와 폭력성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은 “젠더 정체성과 도덕적 정체성의 분리”를 드러낸다. 오디아르는 “성별 변경이 남성성의 폭력을 해체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에밀리아의 여정을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는 실패한 시도”로 정의한다.

뮤지컬 형식의 기능: 침묵을 깨는 노래

뮤지컬 장르는 영화의 핵심적 은유다. 에밀리아가 라 루세시타 재단 활동 중 피해자 유족들과 합창하는 장면(“당당하게 고개 들고 살기 위해”)은 침묵 강요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형상화한다. 반면, 총기 조립 장면에서 관객의 뮤지컬 기대를 의도적으로 배신하는 오디아르의 연출은 “윤리적 정당성 없이는 노래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문화적 재현의 논란: 오리엔탈리즘 비판

멕시코 평론계는 “서툰 스페인어 억양”, “카르텔의 오락화”, “멕시코 사회의 피상적 묘사”를 지적하며 영화를 비판했다. 프랑스 스튜디오에서 촬영되고, 멕시코 출연진이 극소수인 점은 제국주의적 시선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오디아르는 “의도적 왜곡이 아님”을 강조했으나, “타문화 서사의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5. 오디아르의 시각: 구원이라는 이름의 유토피아 찾기

폭력의 유전학: <예언자>에서 <에밀리아 페레즈>까지

오디아르의 작품 세계는 “폭력이 개인과 사회를 어떻게 오염시키는가”에 집중한다. <예언자>의 말리크가 감옥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성장하듯, 에밀리아 역시 카르텔 보스 시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 이는 “폭력이 신체보다 정신에 더 깊이 각인된다”는 비관적 시각을 반영한다.

구원의 조건: 타자와의 연대

유일한 희망은 리타와 에밀리아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리타는 초기에는 금전적 이해관계로 움직이지만, 점차 에밀리아의 진정한 동반자가 된다. 이들의 동행은 “서로의 상처를 인정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그러나 영화는 이 연대가 폭력의 세계를 극복하기엔 부족함을 보여주며, “구원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암시한다.


6. 평가: 장르 실험의 성취와 한계

<에밀리아 페레즈>는 오디아르의 “형식적 과감성”과 “사회적 통찰”이 혼종된 작품이다. 트랜스젠더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을 뮤지컬로 풀어낸 점, 폭력의 세대적 전이를 날카롭게 포착한 점은 높이 평가받았다. 반면, 멕시코 문화의 피상적 재현, 산만한 서사 구조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조 샐다나의 여우조연상 수상이 작품의 논란을 상기시키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결론: 신체는 변해도, 과거는 따라잡는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젠더 전환을 통해 자유를 갈구하나 결국 과거의 유령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비극을 그린다. 오디아르는 이 영화로 “개인의 변신이 사회적 구조의 폭력을 청산하지 못함”을 선언하며, 동시대의 젠더 정치학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아카데미의 냉담한 반응과 달리, 이 작품은 장르 영화의 가능성을 확장한 도전적 실험으로 기억될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신분 변경이 아닌, 폭력의 근원적 해체에서 시작된다”는 교훈을 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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