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법 폐지 주장과 미래 반도체 산업 전망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5년 3월 4일 취임 2기 첫 국정연설에서 2022년 제정된 「반도체 지원 및 과학 법(CHIPS and Science Act)」(이하 반도체법)의 폐지를 공식 요구했다. 이 법은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역량 강화를 목표로 527억 달러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끔찍한 법안"이라며 보조금 정책의 비효율성을 강조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관세 인상을 통해 기업들의 자발적 투자를 유도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며, 이로 절감된 예산을 국가 부채 상환에 활용할 수 있다. 이번 결정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보조금을 기대한 한국 기업뿐만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반도체법의 입법 배경과 주요 내용
제정 과정과 정치적 합의
반도체법은 2022년 7월 미 상원과 하원을 초당적으로 통과한 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하여 공식 발효되었다. 이 법안은 미국의 반도체 자급률 강화와 중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 대응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2020년대 초반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한 반도체 공급망 차질과 대만·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 집중된 생산 역량의 취약성이 드러나자, 미국 의회는 생산 기반을 본토로 재편하기 위한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재정 지원 구조와 투자 유치 성과
반도체법의 핵심은 527억 달러 규모의 지원 프로그램으로, △생산 보조금 390억 달러 △연구개발(R&D) 지원 132억 달러 △저리 대출 및 세제 혜택으로 구성된다. 이를 통해 인텔, TSMC,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기업들이 미국 내 첨단 파운드리 건설을 약속하며, 2025년 기준 총 4,000억 달러 이상의 투자가 유치되었다. 특히 인텔은 애리조나·오하이오 주에 200억 달러 규모의 공장을 건설 중이며,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를 투자해 3nm 공정 라인을 구축할 계획이다.
중국 진출 제한 조항
반도체법 수혜 기업은 10년간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5% 이상 확대할 수 없으며, 위반 시 지원금 전액을 반환해야 한다. 이는 미국 기술이 중국 군사력 강화에 활용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가드레일 조항'으로, TSMC와 삼성전자가 난징·시안 등에 위치한 기존 공장의 확장을 사실상 봉쇄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법 폐지 주장과 논리
보조금 정책의 비효율성 비판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법을 "낭비적이고 끔찍한 법안"으로 규정하며, 보조금 지급이 기업들의 실제 투자 유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천억 달러를 지원했으나 기업들은 미국 내 생산량을 증가시키지 않고 있다"며, TSMC의 애리조나 공장 건설 지연(2024년 예정에서 2025년으로 연기)과 삼성전자의 텍사스 공장 완공 지체를 근거로 제시했다. 또한, "반도체 기업들은 관세 면제를 원할 뿐, 보조금은 불필요하다"며, 2025년 4월 2일부터 단계적으로 도입 예정인 상호관세 제도를 통해 더 효과적인 투자 유치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관세 주도의 투자 유인 전략
트럼프 행정부는 반도체법 폐지 후 수입 반도체에 대한 관세 인상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예를 들어, 미국산 제품에 대한 상대국의 관세가 2.5%일 경우, 해당 국가 수입품에도 동일한 2.5%의 관세를 부과하는 균형관세 정책을 도입한다. 이를 통해 삼성·TSMC와 같은 해외 기업들이 관세 회피를 위해 미국 내 생산을 확대할 것이라 예상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가 기업들의 진정한 인센티브"라며, 2017~2020년 1기 행정부 당시 철강 관세(25%) 부과 후 미국 내 생산량이 15% 증가한 사례를 성공 모델로 제시했다.
재정 절감 및 부채 상환 목표
반도체법 폐지로 절감된 527억 달러는 국가 부채 감축에 우선 사용될 예정이다. 2025년 1월 기준 미국의 국가 부채는 34조 달러를 넘어섰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재정 적자를 2028년까지 4조 달러 축소한다는 목표를 발표한 바 있다. 또한, 잔여 예산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 및 화석 연료 인프라 확충 등 공화당의 에너지 정책에 재배정될 전망이다.
반도체법 폐지의 산업적 영향
한국 기업에 대한 직접적 타격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법에 따라 각각 64억 달러·4억 5천만 달러의 보조금을 승인받았으나, 트럼프 정부의 법 폐지 움직임으로 자금 지원 취소 위기에 직면했다. 삼성은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를 투자해 3nm 공정 라인을 구축 중이며, 2025년 말 완공 예정이었으나, 보조금 미지급 시 추가 투자 여부를 재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도 미시시피 주 클린튼에 15억 달러 규모의 패키징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지만, 자금 조달 계획 수정이 불가피하다.
TSMC와 인텔의 전략적 대응
TSMC는 바이든 행정부 말기인 2024년 11월 서둘러 66억 달러 보조금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트럼프 정부의 정책 변화에 대비했다. 이에 따라 애리조나주에 650억 달러를 투자해 2nm 이하 공정 라인을 2026년까지 완공할 예정이며, 트럼프 대통령도 "TSMC의 투자는 미국의 AI 리더십 강화에 필수적"이라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인텔은 자국 기업으로서 85억 달러의 보조금을 확보했으나, 이 역시 재협상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가능성
반도체법 폐지는 미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IDC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 세계 첨단 반도체 생산의 75%가 대만·한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미국의 점유율은 12%에 그친다. 관세 정책만으로는 생산 시설 이전을 유도하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Gartner는 "반도체 공장 건설에는 최소 5년과 100억 달러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므로, 단기적 관세 인상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정책의 경제학적 평가
관세 정책의 이론적 배경
트럼프 행정부의 접근법은 보호무역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다. 고관세 부과로 해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켜 국내 생산을 촉진한다는 '유치산업 보호론'을 적용한 것으로, 19세기 독일의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주장한 경제 모델과 유사하다. 하지만, 현대 경제학계에서는 관세가 소비자 물가 상승과 무역 전쟁을 초래할 위험성이 크다고 경고한다. 2018년 중국과의 관세 충돌 당시 미국 소비자물가는 연간 2.3%에서 3.5%로 급등한 바 있다.
보조금 vs 관세: 비용 편익 분석
반도체법의 보조금 총액인 527억 달러는 미국 연방정부 예산의 0.1% 수준이지만, 트럼프 정부는 관세를 통해 예산 지출 없이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관세 수입은 2024년 기준 연간 880억 달러로 추산되며, 이를 모든 반도체 수입품(연간 3,500억 달러)에 25% 관세를 부과할 경우 875억 달러의 추가 수입이 발생한다. 단, 이는 수입량이 동일하게 유지될 때의 이론적 계산이며, 실제로는 수요 감소로 인해 세수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미래 전망 및 정책 권고
단기적 영향: 투자 계약 재협상
2025년 상반기 중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트럼프 행정부와 새로운 조건을 협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조금 대신 관세 면제 혜택을 요청하거나, 생산 시설 규모를 조정하는 방안이 논의될 것이다. TSMC의 경우 이미 보조금 계약을 완료했으나, 향후 추가 투자 시 관세 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장기적 과제: 기술 리더십 유지
미국이 반도체 법을 폐지할 경우 R&D 투자 감소가 우려된다. 반도체법의 132억 달러 연구 예산 중 50억 달러가 차세대 포장 기술·양자 컴퓨팅 칩 개발에 할당되어 있었는데, 이 예산이 삭감되면 IBM·애플 등의 혁신 속도가 둔화될 수 있다.
정책적 제언
- 혼합 정책 도입: 보조금 완전 폐지 대신, 일부 예산을 관세 인프라에 재배치하여 이중적 혜택 추구
- 국제적 협력 강화: 한국·일본과의 3자 협정을 통해 공동 투자 프로젝트 발굴
- 노동력 교육 프로그램: 반도체 산업 인력 양성을 위한 주립대학과의 협력 프로그램 확대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법 폐지 움직임은 단순한 정책 변경을 넘어 글로벌 기술 패권 재편의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관세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접근이 과연 반도체 생태계에 효율성을 가져올지, 아니면 무역 갈등만을 증폭시킬지 향후 2~3년 내 입증될 것이다.